'집집마다 다녔을 것이다'
1897년 2월에 엘리자베스 맥큔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할 준비를 했다. 관광이 그 여행의 목적이긴 했으나, 그녀는 또한 영적인 목적도 추구했다.
1898년 3월 11일에 후기 성도 교회의 제일회장단은 정기적으로 예정된 업무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모임이 되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과 그의 보좌들인 조셉 에프 스미스와 조지 큐 캐논은 최근에 세계 여러 지역의 선교부 회장들로부터 자매 선교사들을 요청하는 편지를 한 웅큼 받았다.1 이 편지들 중 하나는 유럽 선교부 회장단의 조셉 더블유 맥머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장로들은 발언의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는 반면 우리 자매들이 주목을 받는 경우"에 대해 언급했다. 그 서신에 따르면 그는 "똑똑하고 지성을 갖춘 다수의 여성들이 영국으로 선교사 부름을 받는다면 매우 흡족한 결과를 얻게 될 것”2이라고 믿었다.2
“똑똑하고 지성을 갖춘 다수의 여성들이 영국으로 선교사 부름을 받는다면 매우 흡족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조셉 더블유 맥머린
유럽 선교부 회장단
유럽 선교부 회장단
제일회장단은 약간의 토론 끝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독신 자매 선교사들을 부르고 성별하여 복음을 전파하도록 승인하는 증명서를 그들에게 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조처로 후기 성도 선교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교회 여성들에게도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렸다.
엘리자베스 맥큔이 없었다면 맥머린은 결코 그런 편지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1852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클라리지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유타 주의 시골인 니파이에서 성장했다. 그녀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그녀의 부친 새뮤얼은 오늘날 네바다 주 남부 사막 지역인 황량한 "머디" 선교부를 개척하라는 브리검 영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몇 년 후에 북쪽 지역으로 돌아와서 소녀 시절의 연인이자 장래가 유망한 젊은 사업가 알프레드 더블유 맥큔과 결혼했다. 놀라울 정도의 잇따른 사업 성공으로 곧 알프레드와 엘리자베스는 유타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런 부를 얻는 것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알프레드가 사업에 점점 더 몰두하느라 교회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남편에게 충실한 동반자로 남아 그가 신앙을 되살리는 경험을 하게 되도록 기도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그 부에 대한 청지기로 여기며 식구들이 교회에 후한 헌금을 하고 궁핍한 이웃과 다른 가족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을 와드의 젊은 여성 상호 향상회에서 봉사하고 능숙한 계보 탐구자가 되는 데 사용했다.
유럽 여행
1897년 2월에 맥큔 가족은 광범위한 유럽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이 여행에서 엘리자베스의 고국인 영국과 더불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로도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맥큔 가족은 많은 곳을 관광할 계획을 세웠지만, 한편으로 엘리자베스는 그 여행을 자신의 혈통을 찾는 기회로 보았다.
“복음의 원리들을 설명할 때 그대의 마음은 천사의 마음처럼 깨끗할지니라.”3
로렌조 스노우가 엘리자베스 맥큔에게 준 축복
영적인 노력으로서 혈통 찾기를 고려한 그녀는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신권 축복을 받고자 로렌조 스노우 회장을 찾아갔다. 스노우 회장이 그녀에게 한 말은 또 다른 영적 목적을 암시했다. "그분이 했던 훌륭한 약속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복음의 원리들을 설명할 때 그대의 마음은 천사의 마음처럼 깨끗할지니라.’”4 그 약속은 엘리자베스가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에 관련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 여행을 하던 시기에 엘리자베스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둔 45세의 어머니였다. 제일 어린 네 명의 자녀가5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당시에 대영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19세의 아들 레이몬드와 재회하기를 고대했다. 맥큔 가족은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한 휴양지인 이스트본에서 집을 하나 빌렸다. 그 집은 “크고 널찍했으며, 뜰은 넓고 아름다웠다.”6 그녀는 레이몬드와 그 지역의 다른 몇몇 장로들을 초대하여 가족과 함께 머물게 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딸 페이는 정기적으로 그 장로들과 함께 이스트본의 바닷가 산책길에서 갖는 길거리 집회에 참석했다. 모녀는 군중의 주의를 끌기 위해 찬송가를 불렀으며 장로들이 설교를 하는 동안 그들의 책과 모자를 들고 있었다.7 장로들은 이런 모임을 마친 후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맥큔 가족의 임시 거처인 그레인지 가든스 4호실로 자신들을 찾아오라고 권했다. 그런 거대한 별장으로의 초대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몰몬 장로들은 대체로 그보다 훨씬 더 아담한 곳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길거리 집회와 더불어 장로들과 함께 집집마다 다니며 소책자를 나눠주는 경험을 하면서8 자신이 이따금 사람들로부터 받는 경멸적인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견뎌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소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젊은 남성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고 그래서 잘 해낼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이 직접 말을 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녀가 "그 특권을 갖게 되면 자신이 성공하기를 매우 열렬하게 소망하더라도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기회는 올 것이었으며, 그것도 그녀가 기대했던 시기보다 더 일찍 오게 된다.
'악명 높은 저먼'
1880년대와 1890년대 동안에 한때 후기 성도였던 윌리엄 저먼이라고 하는 사람이 영국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최근에 출판한 반몰몬 서적을 선전했다. 교회에 대한 그의 무제한적인 공격과 유타에서의 삶에 대한 불미스러운 주장은 그 선정성 때문에 동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한때 회원이었다는 "내부자" 신분 때문에 더 큰 힘을 얻는 듯했다. 간단히 말해 그는 교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문제를 야기했다.9 몰몬 여성과 그들의 역할에 대한 그의 주장은 특히 노골적인 것이었으므로 선교사 지도자들은 젊은 남자 선교사들의 힘으로 싸우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97년이 저물어가면서 반연차 런던 대회의 시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런던 지역의 성도들은 현지 지도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10월 28일에 클러큰웰 시청에 모였다. 엘리자베스 맥큔은 그 대회의 오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다. 그 시청은 "성도들과 비성도들로 가득했는데, 매우 유명한 사람들도 몇 사람 참석해" 있었다. 룰론 에스 웰스 회장과 그의 보좌인 조셉 더블유 맥머린이 회중에게 말씀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말씀에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곳에 임한 권능으로 청중 전체가 개심했음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맥머린은 "저먼과 그의 딸들이 몰몬 여성은 유타의 담벽 뒤에 갇혀서 무지하고 저속한 상태에 있다는 비열한 거짓말을 매우 부지런히 유포했다"고 말씀했다. 그런 후 그는 엘리자베스를 깜짝 놀라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오늘 이 대회에는 유타에서 남편이랑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 온 숙녀 분이 참석해 있으며, 우리는 그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맥큔 자매님에게 오늘 저녁 모임에서 여러분에게 유타에서의 경험을 말씀해 달라고 부탁하려 합니다."1010
이후에 그녀는 그 발표를 듣고 "떨려서 죽을 뻔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맥머린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유타에서 온 숙녀분"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저녁 모임에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권유했다.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기도를 보태 주겠다며 나를 안심시켰고,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과 지지를 열렬히 간구했다." 그녀는 겸손히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타에 있는 그 많은 훌륭한 여성 연사 중 한 사람만 모셔 와서 이 중요한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1
'유타에서 온 숙녀'
저녁 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시청은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대회의 기록자는 이렇게 적었다. “대회실에 여분의 의자들을 가져다 놓고 위층 관람석까지 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12 소문이 퍼져서 유타에서 온 이 숙녀의 말을 들으려고 호기심 어린 군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종교의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남편들은 여성들이 오로지 설거지를 하고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만 창조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모임과 강연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고 자기 계발을 이룰 모든 것에 참여하도록 배려합니다. 우리 종교의 가르침은 아내가 남편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맥큔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리며 청중에게 말씀하기 위해 일어섰다. ... 나는 그들에게 내가 유타에서 성장했고 그 지역의 거의 모든 세세한 부분과 주민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미국과 유럽 여러 곳을 둘러본 광범위한 여행에 대해 말했으며, 유타의 몰몬 여성들만큼 존중받는 여성들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종교의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남편들은 여성들이 오로지 설거지를 하고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만 창조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모임과 강연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고 자기 계발을 이룰 모든 것에 참여하도록 배려합니다. 우리 종교의 가르침은 아내가 남편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13
엘리자베스가 참석하고 말씀함으로써 미친 영향은 강력했다. 몰몬 여성이 전한 이 단순한 설교는 저먼이 일으킨 치욕을 씻는 과정에서 장로들이 행한 최선의 노력보다도 더 많은 기여를 했다. 그 모임이 끝난 후 몇몇 비성도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사람은 "당신네 여성들이 더 많이 이곳에 온다면 훌륭한 일을 아주 많이 하게 될텐데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몰몬 여성을 직접 보고 연설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늘 마음속에 간직했었지요. 부인, 부인께서는 목소리와 말로 진리를 전하셨어요.”14 엘리자베스는 이후에 “그 일을 계기로 우리 자매들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모임의 성과를 신중하게 기록한 맥머린 회장은 엘리자베스에게 그다음 일요일에 열리는 노팅엄 대회에 함께 가자고 권했다. 그녀는 노팅엄에서 아들 레이몬드와 함께 말씀을 했다. 그녀의 말씀 주제는 “유타 사람들의 상황”15 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대회 후에 모든 지부에서 나에게 자신들의 모임에 와서 말씀을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대회장을 사람들로 붐비게 하겠다고 말했다.”16
그녀가 곧 이탈리아로 떠나야 했기에 말씀할 기회를 더 갖지는 못했지만 그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맥머린 회장은 그녀의 노력이 "많은 편견을 가라앉히는 도구"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맥큔 가족이 떠난 직후에 제일회장단에게 서신을 보냈다. 유타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대영제국에서 보낸 다른 개인 서신들을 받으면서 “유타 여성들의 간증이 이 땅에서 미친 중요한 영향"이라고 언급하는 서장을 되새기게 되었으며 "오래된 잘못된 생각"을 밀어내고 좀 더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17
계획을 실행함
제일회장단이 1898년 3월 11일에 자매 선교사들을 부르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몇 주 사이에 그 소식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청남 및 청녀 상호 향상회 위원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조지 큐 캐논 회장은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여성 몇 명에게 부름을 주어 선교 임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18 고 발표하고 엘리자베스와 그 외 사람들의 공헌을 언급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 또한 청녀 지도자들에게 "시온의 딸들 앞에 놓인 이 중대한 사업”19에 관해 말씀했다.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여성 몇 명에게 부름을 주어 선교 임지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지 큐 캐논
제일회장단 보좌
제일회장단 보좌
1898년 4월 대회에서 캐논 회장은 교회의 더 많은 청중에게 정기적으로 자매 선교사들을 부르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 자매들 중 한 명을 만나 매우 기뻐했던” 한 여성에 대해 말했다. “지적인 여성이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난하고 억압받은 노예인 그 여성은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교회에 들어온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남성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그러하듯이 우리 여성들도 자신들의 영역에서 지적이고, 내세울 것이 있으며, 여성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캐논은 이 자매들이 의식을 집행할 수는 없지만 “간증을 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고, 소책자를 나눠줄 수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도움이 될 많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20는 점에 주목했다.
1898년 4월 1일에 어맨다 이네즈 나이트와 루시 제인 브림홀은 교회 역사상 최초로 증명서를 받은 독신 여성 복음 선교사로 성별되었다. 그 두 사람은 유럽 선교부로 보내졌으며, 그들이 도착한 4월 21일로부터 사흘 이내에 그들은 여러 지부 모임, 길거리 집회, 여러 대회에서 말씀을 하기 시작하여 "몰몬 여성들의 참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우리 성도들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21 을 방문하는 임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나이트와 브림홀은 선교사로 봉사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 첫 번째 선교사였으며,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맥큔은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선교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더 갖게 된다.22 그녀는 선구자로서 자신의 경험에 관하여 이후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23: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내 마음은 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내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전해 주고 싶은 강렬한 소망으로 불타올랐다. 내가 어디를 방문하든 사람들과 함께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결국 내 마음속에 있는 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종종 나는 복음에 대해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인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갖기도 했다. 이따금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나는 선교사도 아닌데 왜 그런 소망이 생기는 걸까?' 어느 날 나는 딸에게 여성들이 선교사로 부름받게 될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종종 하나님께서 젊은 남성들에게 명했듯이 나에게도 명하셨더라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람들과 함께 온화하게 종교적인 대화를 하며 각 사람에게 나의 진심 어린 간증을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