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충실함을 보고서’


“충실함을 보고서”

공식선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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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아쿠아, 샬럿 아쿠아

성경에는 괴로움과 슬픔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약전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포로가 되어 고향에서 끌려 나왔고,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되었다.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모국은 외세에 점령되어 철권통치를 받았다. 사람들이 구원을 기다린 부분적인 이유는 속박을 견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다.1

지난 5세기 동안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겪어온 일들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방불케 한다. 1500년대 초부터 1888년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흑인들은 모국에서 미대륙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 1900년대 초까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는 외세에 점령당했다.

노예 제도와 제국주의는 대서양 양쪽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으며, 법률은 대부분 백인을 우월한 존재로 대우했다. 1830년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조직된 후, 일부 흑인들이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몇몇 흑인 남성은 신권에 성임되었다. 그러나 인종을 기준으로 분리된 당시의 문화와 외부의 박해 위협은 교회 내의 인종 간 통합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2

1850년대부터 교회는 흑인 회원이 신권 성임 및 성전 의식을 받을 수 없음을 선언함으로써 교회에서 흑인 회원의 참여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따랐다.3 전 세계 곳곳의 흑인들이 그랬듯이, 수많은 흑인 후기 성도들 역시 여러 세대에 걸쳐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하며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몇 십 년에 걸쳐 교회가 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하자, 회복된 복음으로 개종하는 흑인 수는 더 많아졌다. 아프리카와 북중미 및 남미에 사는 새로운 세대의 흑인 개척자들은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교회에서 그들이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신뢰 말이다. 교회 안팎에서 인종에 관한 태도에 희망적인 조짐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종 차별은 널리 확산되고 있었고, 흑인 성도들의 신권 및 성전과 관련한 제한에는 변함이 없었다.4 세 부부, 곧 가나의 샬럿 안도-캐손/윌리엄 아쿠아 부부, 브라질의 에우베시우/루다 투린호 아시스 마틴스 부부, 미국의 조셉/토 라이투알라 프리먼 부부가 겪어 온 일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교회 회원에게 신권 및 성전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한 1978년의 계시가 있기까지, 흑인이 후기 성도가 되는 것이 어떠한 일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샬럿 안도-캐손 아쿠아와 윌리엄 아쿠아, 가나

샬럿 안도-캐손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열두 형제자매와 함께 성공회 교회에 다녔다. 태생적으로 종교적이었던 샬럿은 찬송가뿐 아니라 미사 용어까지 모두 다 외울 정도였다.

샬럿이 11살쯤 되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조셉 윌리엄 빌리 존슨이라는 현지 목사를 만나게 된다. 존슨은 다른 목사들과는 어딘가 좀 달랐는데, 그는 성경 외에 몰몬경이라고 하는 다른 경전 내용으로도 설교를 전했다. 샬럿은 모세와 마가 같은 이름뿐 아니라 모로나이, 니파이, 암몬 같은 이름을 들으며 자랐다. 그녀는 전통적인 찬송가뿐만 아니라 복음의 회복과 시온에 관해 노래하는 후기 성도 찬송가도 불렀다. 때로는 교회 사람들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몰몬경의 이노스처럼 기도로 주님과 씨름하기도 했다.5

샬럿이 다니던 교회의 회중은 지붕에 큰 금이 가 있는, 쓰러져 가는 건물에 모였지만 그들은 먼 곳에 있다는 성전을 늘 기억하고자 모로나이 천사 상으로 그 건물을 장식했다. 회중 가운데 일부는 가나에 있는 아름다운 성전에 흰옷을 입고 서는 날을 꿈꾸고 예견하기도 했다.6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먼저 교회 본부의 대표자가 와서 그들을 공식적으로 이 전 세계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978년, 대학을 마치던 해에 샬럿은 선택의 갈림길 사이에서 갈등했다. 한편, 존슨 형제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백인 회원 수가 압도적인 이 교회가 가나에 있는 흑인 후기 성도 회중을 인정해 줄 날이 오고 있다고 점차 확신하게 되어 여러 날 동안의 금식을 인도하며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했다. 그 시기에 샬럿은 윌리엄 아쿠아와 교제를 시작했다. 윌리엄은 샬럿의 후기 성도 친척과 친구들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교회의 가르침에는 회의적이었으며, 교회의 빈약한 시설에 비판적이었고, 일반적으로 백인들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가나의 후기 성도들이 자기들 나라로 오기를 기도하는 백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우베시우 마틴스와 루다 투린호 아시스 마틴스, 브라질

1970년대 초, 에우베시우와 루다 마틴스 부부는 브라질에서 종교적 진리를 찾고 있었다. 이 부부는 루다 집안의 격려로 몇 년간 마쿰바를 따랐는데, 마쿰바란 아프리카 전통과 가톨릭의 가르침 및 심령술이 뒤섞인 종교를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마쿰바가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며, 세상을 떠난 친족이나 조상에게 더 다가가게 해 주지도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7

1972년,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그들 집 문을 두드렸다. 에우베시우는 흥미를 느끼기는 했으나 크게 염려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 교회는 인종 갈등의 역사로 얼룩진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데, 흑인을 어떻게 대우하죠? 교회로 받아들여 주기는 하나요?”

에우베시우는 이 질문에 두 선교사 중 나이가 좀 더 있는 선교사가 의자에 앉은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던 모습을 기억한다.8 선교사들은 대답하기 전에 에우베시우와 루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고 나서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권 및 성전 제한 문제를 최대한 아는 데까지 설명해 주었다. 에우베시우는 대답에 만족감을 느끼고 다른 새로운 가르침에 몰두했다. 에우베시우와 루다는 몇 달이 채 안 되어 교회에 있는 “말씀에 따르는 영과 … 회원들의 사랑”에 용기를 얻어 침례를 받았다.9 그들은 기꺼이 복음을 통해 삶을 향상시켰고, 또한 일부 신권 관련 축복을 받게 되는 날은 복천년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들은 침례를 받고 약 1년 후에 축복사의 축복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마틴스 가족이 이생에서 한 가족으로 인봉되며, 아들 마르쿠스는 선교사로 봉사하리라는 암시가 담겨 있었다. 이 가족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런 축복을 기다리라는 말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주님이 계획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들이 그것에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르쿠스를 위해 선교사 비용 저축 계좌를 만들었다.10

그 후 몇 년간 마틴스 가족은 계속 교회 안에서 성장해 나갔다. 이를 지켜보는 회원들은 도움을 주면서도 어떨 때는 동정심을 내비침으로써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어느 때인가 감독은 에우베시우가 신권에 성임되지 않은 채 교회에 충실히 남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으로 느낀다는 말을 했다. 이에 에우베시우는 이렇게 답했다. “감독님, 그것이 저의 가장 큰 시련이라면 감사할 일이지요.”11

1975년, 에우베시우가 교회의 지역 홍보 책임자로 부름을 받으면서, 이들 부부는 브라질 상파울루 성전 건설 부지를 둘러보도록 초대되었다. 부지를 둘러보는 동안 에우베시우와 루다는 어느 지점에 멈춰 섰는데, 나중에야 그들은 그 지점이 해의 왕국실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우베시우는 이렇게 회상했다. “강한 영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해졌어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12

2년 후,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성전 정초식에서 에우베시우를 가까이로 불렀고, 이렇게 권고했다. “마틴스 형제님, 형제님에게 필요한 것은 충실함입니다. 충실함을 유지하면 복음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13

신권도 없고 성전 의식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복음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듬해 마르쿠스는 아프리카 흑인 조상이 없는 한 교회 회원과 약혼했다. 루다는 언젠가 모든 회원에게 모든 축복이 주어지리라는 약속을 기꺼이 믿기는 했으나, 성전 결혼을 할 가망이 없다는 현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조셉 프리먼과 토 라이투알라 프리먼, 미국

조셉 프리먼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접하기 아주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그는 평신도 성직자가 되었다. 1972년, 조셉은 육군에 입대해 하와이에 있는 기지에 배속되었다. 조셉은 군 복무에 매진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유 시간에는 전도와 기도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인도를 구하며, 일주일 간 휴가를 내 외딴 바닷가에서 닷새 동안 금식했다. 조셉은 이렇게 회상했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에, 가르칠 힘과 영적 능력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말 그대로 주님께 애원했죠.”14 또한 그는 자신 못지않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내를 찾게 해 달라는 두 번째 소망을 기도로 피력했다.

얼마 후, 조셉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라이에에 있는 폴리네시아 문화 센터에서 몇몇 후기 성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복음에 관한 그들의 식견에 감동했다. 특히 선교사로 봉사하고 돌아와 있던 토 이사펠라 라이투알라 자매를 보고서 자신이 찾던 여성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새로운 친구와 선교사, 그리고 토와 대화를 나누면서, 조셉은 그리스도의 회복된 교회를 찾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1973년 9월 30일에 침례받았다.

새로운 교회 회원이 된 조셉은 인종과 교회에 관련하여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그는 와드에서 자신이 유일한 흑인 회원이라는 데 신경이 쓰였다. 이 밖에도 신권 및 성전 제한이 조셉과 그의 가장 깊은 두 가지 소망 사이에 벽처럼 서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성직자가 될 수도 없고 그토록 바라는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성전 결혼을 원했던 토는 조셉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연락을 끊었다.

조셉은 그런 제한에 대한 일반적인 정당성을 뒷받침할 경전 상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 혼란스러웠는데제한에 대한 대부분의 정당성은 전세의 삶에 관한 추측과 연관이 있는 것들뿐이었다. 동시에 그는 언젠가, 적어도 복천년에는 흑인 남성에게 신권이 부여되리라는 약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조셉은 이렇게 회상했다. “저에게 복천년은 이해력을 넘어설 만큼 멀리 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그 크고 두려운 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15

교회 내에서 흑인으로서 겪는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조셉은 계속해서 복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성신의 은사는 매일같이 저에게 더 큰 인도와 화평의 근원이 되었고 제 삶에서 더 영속적인 부분이 되었습니다.”16 개종 후 곧 성신의 은사는 그의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고 토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조셉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셉과 결혼하면 오랫동안 소망해 온 성전 인봉을 받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관계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속삭임을 느꼈다.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고 곧이어 감독과 결혼 문제를 상의했다. 처음에 감독은 당시 다른 인종 및 다른 문화 간의 결혼에 관한 일반적인 염려를 표했으나 두 사람이 금식하고 기도한다면 성신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조셉과 토는 금식하고 기도했으며, 영을 통해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은 헤어지라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받은 응답에 계속해서 충실했다. 두 사람은 1974년 6월 15일에 결혼했다.

이들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축복으로 얻었다. 두 사람은 군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다. 이들은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더 낳았다. 이들이 솔트레이크시티에 정착한 한 가지 이유는 흑인 성도들을 위해 교회가 후원하는 사회적 영적 그룹인 제네시스 그룹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17 조셉은 교회 생활에 대부분 만족해했다. 하지만 여전한 걱정은 아들들이 또래들과 같이 신권을 받지 못해 십 대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보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자긍심을 잃지 않고 상황을 헤쳐 나가도록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약속해 온 날

가나와 나이지리아의 성도들이 성장하고 북중미 및 남미에서 마틴스 가족이나 조셉 프리먼과 같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충실함을 본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이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 한번은 자기가 읽을 몰몬경을 요청하며 “순전한 몰몬”이 되도록 도와 달라는, 가나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인 에마누엘 본다의 편지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일화도 있었다.18

1978년 초까지, 킴볼 회장은 신권 성임과 성전 축복을 교회의 흑인 회원에게 확장하는 문제에 관해 계시를 받고자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했다. 그는 이 문제를 제일회장단 보좌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들과 함께 오랫동안 논의했으며, 연구하고 기도할 사안으로 삼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1978년 6월 1일, 킴볼 회장은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와 성전에서 만났다. 그는 제한에 관한 사도들의 생각과 권고를 다시 한 번 구한 다음,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회상했다. “전에 저는 몇 가지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지만 … 이토록 규모가 큰 적은 없었습니다. 모든 사도는 곧바로 킴볼 회장님의 끈질긴 탄원에 대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영혼 속으로 느꼈습니다.”19 일주일 후, 제일회장단은 전 세계 교회 지도자에게 이 제한이 해제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이 성명서는 후에 공식선언-2로 교리와 성약에 정경으로 포함되었다.

이 발표가 난 다음 날, 조셉 프리먼은 감독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 일이 일어난 그 주는 주말에 스테이크 대회가 예정되어 있던 때였다. 조셉은 접견을 하고 지지를 받았으며 1978년 6월 11일, 그는 이 계시 후에 멜기세덱 신권에 성임된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기도해 온 권세를 지니고서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주 후, 조셉과 토는 자녀들을 성전에 데려 갔다. 조셉과 토의 가족이 제단에 무릎을 꿇자,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가 의식문을 낭송한 다음 현세와 영원을 위해 그들을 함께 인봉했다.20

브라질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마틴스 가족은 아들 마르쿠스가 선교 사업을 하도록 결혼을 연기했다. 축복사의 축복에 마르쿠스의 선교 사업이 언급되어 있었기에, 부모는 이를 위해 돈을 저축해 왔었다. 에우베시우는 장로로 성임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마르쿠스를 같은 직분에 성임하는 원에 함께 섰다. 에우베시우는 “기쁨이 넘쳤습니다.”라고 회상했다.21 불과 몇 주 후, 그는 가정부의 아들에게 신권 축복을 주어 그 아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해 11월, 브라질 상파울루 성전이 세워지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마르쿠스를 포함한 마틴스 가족은 그곳에서 인봉 의식을 받았다.22

신권에 관한 계시가 주어지면서, 드디어 가나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와 회중을 공식적으로 조직할 길이 열렸다. 샬럿과 같은 회원들은 이 일은, 분명 성도들의 연이은 금식과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하지만 남편 윌리엄은 그만큼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나름대로 연구를 해 오면서 백인뿐 아니라 역사와 신앙에 대한 백인의 해설까지도 믿지 않게 되었다. 백인을 접하면서 얻은 것은 더 큰 불신뿐이었기에 윌리엄은 이 백인 선교사들이 자신의 조국에 어떤 좋을 것을 가져다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23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윌리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년 선교사 부부인 리드와 나오미 클레그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에게 복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따뜻하고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치는 한편,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했다. 윌리엄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분들은 어느 백인도 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저를 환영해 주셨습니다.”24 백인 전달자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가 사라지자, 복음이 윌리엄의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침례받고 신권에 성임되었다. 또한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초기 회원들의 꿈처럼 가나에 성전이 있게 된 2004년까지 그는 가나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았다.

신앙으로 힘써 앞으로 나아가며

에우베시우 마틴스가 1970년대 중반에 감독에게 밝혔듯이, 신권 및 성전 제한은 흑인 회원들이 생활에서 겪는 여러 시련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시련 외에도 자기가 속한 와드나 지부에서조차 문화적 오해와 편견에 처하는 경험을 했었고, 또 그런 경험을 지속적으로 겪는 사람도 많았다. 아울러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성도들은 그런 제한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한을 종결하게 하는 계시가 주어진 후, 세계 방방곡곡의 교회 회원들은 동료 성도와의 실질적이고 뜻깊은 통합을 경험하고 있다. 회원들은 인종을 넘어서서 가정 복음 교육과 방문 교육, 교회 부름, 봉사 및 우정 증진을 통해 자주 서로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한다. 회원들은 서로 배우고, 서로 권고하며, 서로의 시각과 경험을 더 잘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

후기 성도들은 수 세기에 걸친 노예 제도, 식민지화, 의심 및 분열로 야기된 문제들과 아직도 씨름 중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으로 보살피며, 교회 내 우정 증진을 통해 한 마음 한 뜻이 될 기회가 있다. 교회 회원들은 겸손과 신앙으로 힘써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 모두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와 힘을 얻는다.

  1. 구약전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였으며, 그 후 많은 사람이 앗수르와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경에 포함되어 있는 몇몇 책은 희랍 세력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대와,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인 신약전서 시대에 쓰여졌다.

  2. 선교사들이 1830년에 커틀랜드 지역을 방문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인 최초의 흑인은 전에 오하이호에 살던 노예, 피터 케어인 것으로 추정된다. (Mark Staker, Hearken O Ye People: The Historical Setting of Joseph Smith’s Ohio Revelations [Salt Lake City: Kofford Books, 2009], 3 참조) 엘리야 아벨, 제인 매닝 제임스, 큐 워커 루이스 및 그린 플레이크는 초기 흑인 성도의 다른 예이다. 초기 후기 성도의 이웃들은 종종 성도들이 미국의 흑인들과 위험할 만큼 격없이 지낸다고 보았다. 이런 인식은 일찍이 잭슨 군이 자기들의 노예를 허락없이 건드린다고 성도들을 고소했던 1832년의 폭압이 일어나는 데에도 한몫했다. (W. Phelps, “To His Excellency, Daniel Dunklin, Governor of the State of Missouri,” The Evening and the Morning Star, vol. 2, no. 15 [Dec. 1833], 226–31 참조)

  3. “인종과 신권”, 복음 주제, topics.lds.org 참조.

  4.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에서 흑인들이 획득한 법적 지위의 개선 정도는 1970년대에 이르러 그 속도가 더디어졌다. 남부의 차별 법 철폐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이 북부에서 인종 간 통합을 추진하는 일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아프리카에서도 여러 나라가 독립을 이루었으나, 1970년대에 그 국가들은 국제 사회에서 동등한 국가로 참여하는 데에는 아직도 크나큰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5. 윌리엄 이 디 및 샬럿 에이 아쿠아, 매튜 케이 하이스가 한 인터뷰, 가나 케이프코스트, 1999년 10월 16일, OH 2238, 인쇄본, 교회 역사 도서관, 26쪽.

  6. 아쿠아, 인터뷰, 22쪽.

  7. Helvecio Martins and Mark Grover,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Salt Lake City: Aspen Books, 1994), 39–40.

  8.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44.

  9.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45.

  10.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46.

  11.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57.

  12.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64.

  13.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66.

  14. Joseph Freeman, In the Lord’s Due Time (Salt Lake City: Bookcraft, 1979), 43.

  15. Freeman, In the Lord’s Due Time, 67–68.

  16. Freeman, In the Lord’s Due Time, 66.

  17. Freeman, In the Lord’s Due Time, 87, 100–101. 제네시스 그룹은 러핀 브리지포스, 다리우스 그레이, 유진 오어 등 세 흑인 회원이 그 지역의 몇몇 흑인 회원에게 봉사하며 이들이 재활동되도록 도와 달라는 요청에 응하여 결성된 것이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고든비 힝클리 장로,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가 이 세 흑인을 만나 그룹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Edward L. Kimball, “Spencer W. Kimball and the Revelation on Priesthood,” BYU Studies vol. 47, no. 2 [2008], 30 참조)

  18. Janath Russell Cannon and Edwin Q. Cannon Jr., Together: A Love Story, (Salt Lake City: Desktop Publishing, 1999), 153.

  19. Kimball, “Spencer W. Kimball and the Revelation on Priesthood,” 56.

  20. Chris Peterson, “Black Priesthood Holder Recalls Historic Day,” Deseret News, April 23. 2010, www.deseretnews.com.

  21.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70–71.

  22. Martins, The Autobiography of Helvecio Martins, 78.

  23. 아쿠아, 인터뷰, 8, 12~14쪽.

  24. 아쿠아, 인터뷰,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