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브라운 라이먼

1 May 2019

제8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

1940~1945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은 그녀의 자서전에 “인간의 삶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들어올리도록 돕는 일보다 중요하고 만족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1 라고 썼다. 그녀는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고 새로운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2함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지 3개월 후에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은 에이미는 이 철학을 실천할 여러 기회를 맞았다.

에이미가 관리하던 시절 상호부조회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치지 않고 일했다. 신권 형제들의 협조와 지시 아래 미국으로부터 네덜란드, 그리고 뉴질랜드부터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자매들은 단합하여 전쟁으로 피해가 극심한 나라의 회원과 군인들에게는 생필품 꾸러미를, 적십자사에게는 붕대를, 궁핍한 자들에게는 내의, 의복 및 침구 같은 바느질 제품을 보냈다.

전쟁은 무수한 가정에 무척 힘든 영향을 초래했다. 세계 곳곳의 아버지와 아들은 싸우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고, 어머니와 젊은 여성들은 전쟁을 지원하는 일을 돕도록 집을 떠나야 했다. 부도덕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3

라이먼 자매는 어머니들에게 가정을 강화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라고 격려했다. 1943년에 발행된 상호부조회 잡지(Relief Society Magazine)에는 이런 기사가 쓰여있다. “본부 임원회는 교회의 어머니들에게 자녀들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보호막을 설치하기를 촉구합니다. 사악한 영향력이 널리 퍼져 가장 훌륭한 가정까지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가 전쟁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으므로 어머니들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에이미는 여성들에게 바느질, 텃밭 가꾸기, 식품 보존 및 저장법 같은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라고 권고했다.

유년 시절

에이미 카산드라 브라운은 1872년 2월 7일 유타주 플레전트그로브에서 존과 마가렛 짐머만 브라운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가렛은 존의 셋째 아내였으며, 에이미는 열 자녀 중 여덟 번째 자녀였다. 비록 가진 재물은 빈약했지만 부모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에이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안 살림 수준은 넉넉지 못했지만 생각의 수준은 높았습니다.”5

교육 및 결혼

브리검 영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에이미는 리차드 알 라이먼을 만났다. 지적, 영적 면에서 서로 통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1896년 9월 9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다. 에이미는 15년 동안 본부 상호부조회 사회복지부를 이끌었으며, 32년 동안 상호부조회 임원으로 봉사했다. 그녀는 유타주 하원 의원직도 한 임기 동안 역임했다. 에이미는 1959년 12월 5일 사망했다.

에이미의 간증

에이미는 복음에 대해 확고한 간증을 지녔기에 적극적이고 가치 있는 교회 봉사를 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간증은 나의 닻이자 나를 붙잡아주는 밧줄이었으며, 기쁘고 즐거울 때는 마음에 만족을, 슬프고 낙심할 때는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내가 성숙하여 주로 시간을 보냈던 상호부조회에서 나는 수많은 회원과 일하면서 그처럼 기쁘고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나는 회원들 가정을 찾아가 잠도 자고,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이 지닌 아름다운 성품, 비이기적인 마음, 따스한 이해심, 깊은 신앙심, 희생 정신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이처럼 자매애 넘치는 훌륭한 봉사에 표현하기 힘든 경의를 표한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