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스미스 스패포드

2 May 2019

제9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

1945~1974

벨 에스 스패포드는 제9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 받은 직후 뉴욕에서 열린 전국 여성 위원회(National Council of Women,NCW)에 초대되었다. 반대에 부딪칠 때도 있었고, 모임에 참석하려면 많은 여행 경비와 귀중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은 50여 년이 넘도록 이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벨 자매와 보좌들은 심사숙고 끝에 상호부조회는 그 위원회를 탈퇴하겠다고 선지자께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벨 자매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에게 이유와 생각을 글로 전달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 위원회에서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현명한 고령의 선지자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탈퇴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저희들이 느끼기에 그렇습니다.’ 벨 자매는 대답했다.

‘자매님, 우리가 그곳에 가서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보시겠습니까?’

‘스패포드 자매님, 저는 놀랐습니다. 자매님은 늘 자신이 얻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시나요? 남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견지에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선지자는 그 종이를 그녀에게 돌려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손을 굳게 잡고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위원회에 계속 참석하시고 그곳에서 자매님의 영향력을 발휘하십시오.’”1

겸손하게 이 권고를 받아들인 스패포드 자매는 이윽고 인내와 충실함으로 함께했던 여성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29년 동안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그리고 42년 동안 전미 여성 단체 협의회의 일원으로, 또 1968년부터 1970년까지는 그 협의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신앙과 지혜와 영감으로 전 세계 여성들이 축복을 받았다.

신권 지도자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에 대해 벨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신권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희들을 감리하시는 형제들을 인도하는 영감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성으로서 그들이 전하는 권고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

유년 시절 및 학업

매리언 이사벨(“벨") 심스 스미스는 1895년 10월 8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헤스터 심스와 존 깁슨 스미스 부부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하나님 아버지와 감독님과 더불어 그녀의 아버지가 벨과 형제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3 학업을 마친 뒤 벨은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특수 교육학을 가르쳤다.4

결혼과 가족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벨은 윌리스 얼 스패포드를 만나 1921년 3월 23일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벨은 두 자녀에게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여성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은 자녀들이 책임감있는 시민으로서 그 구실을 다할 수 있게 하는 가정의 가르침을 통해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배우고 수용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5 그녀는 1982년 2월 2일 사망했다.

상호부조회 하이라이트

상호부조회 자매들은 협력하여 오랜 염원이던 상호부조회 건물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짓기 위해 50만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 건물은 1956년 10월 3일 헌납되었다. 1970년, 상호부조회에서는 더 이상 스스로 기금을 모집하지 않고 예산을 책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매들은 기금 모금 대신 자선 봉사와 방문 교육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 9월에는 모든 교회 자매들이 상호부조회 회원이 되었다.6 벨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근 30년 간을 봉사하는 동안 여섯 분의 선지자의 인도 하에 봉사했다.